백제는 화려함보다 우아함으로 기억되는 나라입니다. 그 백제의 숨결이 가장 짙게 남은 곳이 공주와 부여입니다. 두 도시는 차로 사십 분 거리에 이웃해 있어, 이틀이면 백제의 마지막 두 수도를 차분히 이어 볼 수 있습니다. 웅장한 볼거리로 압도하는 여행이 아니라, 천 년 전 도읍의 흔적을 천천히 더듬는 여행입니다.

백제의 두 수도, 공주와 부여

백제는 한성에서 시작해 두 차례 도읍을 옮겼습니다. 고구려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공주인 웅진에 자리를 잡았고, 다시 너른 들을 찾아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도읍을 옮겨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공주에는 위기를 딛고 나라를 다시 세운 자취가, 부여에는 활짝 꽃핀 백제 문화의 자취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이 두 도시의 백제 유적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함께 올랐습니다. 공산성무령왕릉, 부소산성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궁남지가 그 목록에 들어, 두 도시를 잇는 여행 자체가 백제사를 따라 걷는 길이 됩니다.

공산성 — 강을 낀 웅진의 성

공주 여행은 공산성에서 시작하면 좋습니다. 금강을 끼고 산자락을 따라 쌓은 백제의 산성으로, 성벽 위를 한 바퀴 도는 길에서 발아래로 흐르는 강과 공주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입니다. 흙으로 쌓았던 백제의 성벽이 훗날 돌로 다시 쌓이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성벽을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 남짓 걸리며, 오르내림이 있어 편한 신발이 좋습니다. 저녁이면 성벽을 따라 조명이 들어오고, 철에 따라 강 위로 빛을 비추는 행사가 열려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듭니다. 백제 군사들의 교대 의식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리는 날이면 볼거리가 하나 더 늘어납니다.

공산성 — 금강을 끼고 산자락을 따라 쌓은 백제의 산성
공산성 — 금강을 끼고 산자락을 따라 쌓은 백제의 산성사진 Ashy Minivet · CC0 · Wikimedia Commons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

공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무령왕릉입니다. 백제 무령왕과 왕비를 모신 무덤으로,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백제사 연구의 결정적 자료가 되었습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널방은 당시 중국과 교류하던 백제의 국제적 면모를 보여 줍니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왕과 왕비의 관 꾸미개를 비롯해 수천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실제 무덤은 보존을 위해 막아 두었지만, 가까운 전시관에서 똑같이 재현한 널방에 들어가 볼 수 있고,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출토된 유물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 —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널방
무령왕릉 —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널방사진 Bernard Gagnon · CC0 · Wikimedia Commons

공주에는 백제 너머의 시간도 있습니다. 금강 가의 석장리 유적은 한반도 구석기 문화를 보여 주는 자리이고, 산속의 고찰 마곡사는 봄 풍경이 빼어나 '춘마곡'이라 불리며 여러 산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습니다. 시내의 공주 한옥마을과 제민천 주변 골목은 하룻밤 묵으며 쉬어 가기 좋습니다.

부여로 가는 길 — 사비의 너른 도읍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면 풍경이 한결 너르고 잔잔해집니다. 백제는 좁은 산성을 벗어나 너른 들의 사비로 도읍을 옮기며 계획도시를 펼쳤습니다. 부여 여행의 중심은 부소산성입니다. 시내 바로 곁의 나지막한 산을 두른 성으로,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는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부소산성 안에는 백마강을 내려다보는 절벽 낙화암과, 강가에 자리한 작은 절 고란사가 있습니다. 백제가 무너지던 날의 애틋한 이야기가 깃든 자리라, 강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천 년 전의 시간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강에서는 황포돛배를 타고 백마강을 오르내릴 수도 있습니다.

부소산성 숲길을 따라 오르면 백제의 충신을 기리는 삼충사와, 강과 시내를 내려다보는 영일루·사자루 같은 누각이 곳곳에 자리합니다. 길이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천천히 걷기 좋고, 한 바퀴 도는 데 한두 시간이면 넉넉합니다.

부소산성 — 부여 시내 곁의 숲을 두른 백제의 성
부소산성 — 부여 시내 곁의 숲을 두른 백제의 성사진 The original uploader was WaffenSS at Korean Wikipedia. · CC BY 3.0 · Wikimedia Commons

정림사지와 오층석탑

부소산성에서 멀지 않은 정림사지는 백제 절터입니다. 너른 빈터 가운데 천사백 년을 견뎌 온 오층석탑이 단정하게 서 있습니다. 목조 건물의 비례를 돌로 옮긴 듯한 이 석탑은, 화려함을 절제한 백제 특유의 우아함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유산으로 꼽힙니다.

절터 곁의 정림사지박물관에서는 사라진 절의 옛 모습과 백제 불교문화를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빈터에 홀로 선 석탑을 바라보고 있으면, 화려한 전각이 아니라 비어 있음이 오히려 깊은 울림을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정림사지 — 백제 절터에 남은 전각과 단정한 옛 건축
정림사지 — 백제 절터에 남은 전각과 단정한 옛 건축사진 Bernard Gagnon · CC0 · Wikimedia Commons

궁남지 — 백제의 정원

부여의 또 다른 보석은 궁남지입니다. 백제 무왕이 궁궐 남쪽에 만들었다고 전하는 인공 연못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여겨집니다. 너른 물 가운데 섬을 두고 정자 포룡정을 세워 다리로 이었는데, 버드나무가 늘어진 물가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여름이면 연못을 둘러싼 너른 들이 온통 연꽃으로 뒤덮입니다. 이 시기에 맞춰 서동연꽃축제가 열려, 분홍과 흰빛의 연꽃 사이를 걷는 사람들로 붐빕니다. 이른 아침 물안개가 낀 궁남지는 특히 사진으로 즐겨 담기는 풍경입니다.

궁남지에는 백제 무왕이 된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마를 캐던 소년 서동이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는 '서동요' 설화가 이 연못과 얽혀, 여름 연꽃축제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알고 거닐면 잔잔한 물가가 한층 정겹게 다가옵니다.

백제금동대향로와 박물관

부여를 깊이 이해하려면 국립부여박물관에 들러 볼 만합니다. 이곳의 주인공은 백제금동대향로입니다.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이 향로는 산과 짐승, 신선과 악기를 정교하게 새긴 걸작으로, 백제 공예의 절정을 보여 주는 국보입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향로를 직접 마주하면 그 섬세함에 한 번 더 놀라게 됩니다.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들의 무덤이 모인 자리로,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둥근 봉분이 늘어선 풍경이 단정합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고 고분군을 걸으면, 사비 백제의 마지막 시간을 차분히 더듬게 됩니다.

백제문화단지에서 옛 도읍 보기

유적이 대부분 터로만 남아 아쉽다면, 백제문화단지가 그 빈자리를 채워 줍니다. 사라진 백제의 궁궐 사비궁과 절 능사, 마을을 옛 기록과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너른 터에 재현해 놓았습니다. 단청을 입힌 전각과 높은 오층 목탑을 직접 걸어 보면, 터로만 보던 백제가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아이와 함께라면 더욱 좋습니다. 옛 도읍의 거리를 거닐고 백제인의 생활을 체험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역사를 책이 아니라 발과 눈으로 익히게 됩니다. 가까운 곳에 큰 호수를 낀 산책로도 있어, 쉬어 가기에도 좋습니다.

부여·공주의 맛

백제의 도읍답게 두 도시의 밥상은 담백하고 정갈합니다. 부여에서는 연잎에 찹쌀과 견과류를 넣어 쪄 낸 연잎밥이 별미로, 은은한 연잎 향이 밴 밥 한 그릇이 여행의 피로를 풉니다. 백마강에서 나는 우어로 만든 우어회도 봄철의 특미로 꼽힙니다.

공주는 밤으로 이름난 고장입니다. 알이 굵고 단 공주 밤으로 만든 밤빵과 밤 막걸리가 여행 선물로 인기이고, 푸짐한 국밥과 한정식도 든든합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재료의 맛을 살린 백제의 밥상은, 유적을 걷느라 출출해진 속을 차분히 채워 줍니다.

두 도시의 시장과 골목도 들러 볼 만합니다. 공주 산성시장에서는 푸짐한 칼국수와 손맛 깊은 백반을, 부여 시내에서는 연꽃으로 만든 차와 떡 같은 별미를 만날 수 있습니다. 관광지 식당만 들르기보다 동네 시장의 밥집을 한 번 찾아보면, 백제 도읍의 일상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집니다. 천천히 걷는 여행인 만큼, 끼니 사이사이 이런 소박한 맛을 챙기는 것도 부여·공주 여행의 즐거움입니다.

이틀 코스와 알아두면 좋은 것

첫날은 공주를 봅니다. 공산성 성벽을 걷고 무령왕릉과 국립공주박물관을 둘러본 뒤, 공주 한옥마을이나 제민천 주변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좋습니다. 둘째 날은 부여로 넘어가 부소산성과 정림사지,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을 잇고, 시간이 남으면 백제문화단지를 더하면 알찹니다.

두 도시는 가깝지만 명소 사이를 오가려면 차가 편합니다. 유적이 터로 남은 곳이 많아, 미리 간단한 백제사를 한 번 훑어보고 가면 빈터가 훨씬 풍부하게 보입니다. 여름의 궁남지 연꽃, 가을의 공산성 단풍처럼 계절마다 다른 얼굴이 있으니, 가는 철의 부여·공주가 어떤 모습일지 떠올려 보고 떠나면 좋습니다.

부여와 공주는 큰 목소리로 자랑하지 않는 도시입니다. 빈터에 선 석탑과 강을 낀 성벽, 연꽃에 둘러싸인 옛 연못이 나직이 천 년 전의 이야기를 건넵니다. 화려함 대신 우아함으로 남은 백제를, 두 발로 천천히 걸으며 만나 보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