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작은 섬처럼 보이지만, 막상 들어서면 생각보다 훨씬 넓습니다.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의 풍경이 저마다 달라, 한 번의 여행에서 섬 전체를 다 보겠다고 욕심을 내면 길에서 하루를 다 흘리기 쉽습니다. 제주를 알차게 즐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한쪽 권역을 정해 그 안을 천천히 묶어 도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해돋이 분화구로 이름난 동부를 중심으로, 바다와 숲을 함께 누리는 길을 정리했습니다.

왜 동부를 한 묶음으로

제주는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해안을 따라 둥글게 도는 섬입니다. 명소 사이 거리가 제법 멀고, 길이 해안과 중산간으로 갈려 있어 이리저리 오가다 보면 이동 시간이 금세 불어납니다. 그래서 일정이 2박 3일 안팎이라면, 섬을 한 바퀴 도는 대신 동부면 동부, 서부면 서부로 권역을 정해 묶는 편이 훨씬 여유롭습니다.

동부는 성산일출봉우도, 섭지코지 같은 바다 명소와 비자림·만장굴 같은 숲과 동굴이 비교적 가까이 모여 있어, 한 묶음으로 돌기에 좋은 권역입니다. 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 안팎이면 동부 초입에 닿으니, 첫날 오후부터 일정을 시작하기에도 무리가 없습니다.

성산일출봉 — 동부의 상징

동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성산일출봉입니다. 바다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분화구로, 화산이 만든 가파른 능선이 바다와 맞닿은 풍경이 장관입니다. 정상까지는 계단을 따라 이삼십 분이면 오르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분화구와 바다, 멀리 우도까지 이어지는 전망이 오르는 수고를 잊게 합니다.

이름처럼 해돋이 명소로 유명해, 부지런을 떨면 분화구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일출봉 바로 아래 광치기해변은 썰물 때 드러나는 너른 갯바위와 이끼가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사진 찍기 좋은 자리로 꼽힙니다.

성산일출봉은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고 해 뜨기 전부터 문을 여는 날도 있으니, 해돋이를 노린다면 운영 시간을 미리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정상까지 계단이 가팔라, 서두르기보다 중간 전망대에서 한 번씩 숨을 고르며 오르면 한결 수월합니다.

섭지코지와 동부 해안

성산에서 멀지 않은 섭지코지는 바다로 길게 뻗은 곶입니다. 끝의 하얀 등대와 붉은 화산 절벽, 봄이면 노랗게 물드는 유채밭이 어우러져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했습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제주 동부의 탁 트인 바다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섭지코지로 가는 길과 그 주변에는 잔잔한 만과 작은 해변이 이어져, 차를 잠시 세우고 바다를 바라보기에 좋습니다. 신양섭지해변은 물이 얕고 바람이 잔잔해 가족 단위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섭지코지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글라스하우스유민미술관이 자리해, 자연과 콘크리트가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보여 줍니다. 등대로 오르는 야트막한 언덕길은 바다를 곁에 두고 걷기 좋아, 산책만으로도 한참을 머무르게 됩니다.

섭지코지 가는 길의 잔잔한 바다 — 제주 동부의 탁 트인 해안
섭지코지 가는 길의 잔잔한 바다 — 제주 동부의 탁 트인 해안사진 song songroov · CC BY 3.0 · Wikimedia Commons

우도 — 배 타고 들어가는 작은 섬

시간이 하루쯤 더 있다면 우도를 권합니다. 성산포항 등에서 도항선을 타고 십오 분이면 닿는 작은 섬으로, 자전거나 전기차를 빌려 한 바퀴 도는 재미가 있습니다. 섬 안에는 하얀 산호 모래의 해변과 검은 현무암 해안이 번갈아 나타나고, 가장 높은 우도봉에 오르면 성산일출봉이 바다 건너로 보입니다.

우도의 또 다른 즐거움은 땅콩입니다. 섬에서 자란 땅콩으로 만든 아이스크림과 막걸리가 우도의 명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만 배편은 날씨와 물때에 따라 운항이 달라지니, 들어가기 전에 막배 시간을 꼭 확인해 동선이 꼬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도 안에서는 검은 모래의 검멀레해변과 산호 부스러기가 쌓여 새하얀 서빈백사 해변이 대조를 이룹니다. 섬을 한 바퀴 도는 길에 만나는 여덟 가지 풍경을 '우도 8경'이라 부르니, 표지를 따라 천천히 돌면 작은 섬 하나가 알차게 채워집니다.

우도 — 우도봉과 등대, 밭담이 어우러진 작은 섬
우도 — 우도봉과 등대, 밭담이 어우러진 작은 섬사진 Libjbr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월정리·세화·김녕 — 동부 해변과 카페

동부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오르면 색이 또 달라집니다. 월정리해변은 에메랄드빛 바다를 바라보는 카페거리로 유명해, 바다를 마주한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코스가 되었습니다. 바다 너머로 늘어선 하얀 풍력발전기가 동부 특유의 풍경을 만듭니다.

가까운 세화해변에서는 닷새마다 서는 오일장과 바닷가 플리마켓 '벨롱장'이 열려, 운이 맞으면 소박한 장터의 정취를 만날 수 있습니다. 김녕해변은 새하얀 모래와 맑은 물로 손꼽혀, 한적하게 바다를 즐기기 좋습니다.

월정리 해변 — 에메랄드빛 바다를 마주한 카페거리와 풍력발전기
월정리 해변 — 에메랄드빛 바다를 마주한 카페거리와 풍력발전기사진 Sgroey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동부의 오름 — 다랑쉬와 아부

제주 동부는 '오름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크고 작은 화산 언덕이 많습니다. 그중 다랑쉬오름은 풀밭으로 덮인 둥근 능선과 깊게 팬 분화구로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고, 정상에 오르면 성산일출봉과 우도, 한라산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부오름은 비교적 낮고 완만해 십 분 남짓이면 올라, 가운데 움푹 팬 분화구에 둥글게 자란 나무들이 독특한 풍경을 만듭니다.

오름은 대부분 입장료 없이 누구나 오를 수 있지만, 풀밭과 흙길이라 비 온 뒤에는 미끄럽습니다. 편한 신발과 바람막이만 챙기면, 제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부드러운 능선 산책을 즐길 수 있습니다.

숲과 동굴 — 비자림과 만장굴

제주 동부는 바다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비자림은 수백 년 된 비자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으로, 붉은 화산송이를 깔아 둔 평평한 산책로를 따라 누구나 천천히 걸을 수 있습니다. 숲 안으로 들어서면 한여름에도 서늘하고, 나무 사이로 드는 빛이 고요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가까이의 만장굴은 용암이 흐르며 만든 거대한 동굴입니다. 일부 구간을 개방해, 사철 서늘한 동굴 안에서 용암이 남긴 기둥과 무늬를 직접 볼 수 있습니다. 바다와 숲, 동굴을 하루에 함께 묶으면 제주 동부의 여러 얼굴을 골고루 만나게 됩니다.

비자림 — 수백 년 된 나무가 우거진 동부의 숲길
비자림 — 수백 년 된 나무가 우거진 동부의 숲길사진 Sgroey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에메랄드빛을 원한다면 — 서쪽 협재·금능

흔히 떠올리는 제주의 '그 색' 바다를 보고 싶다면 서쪽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협재해변과 바로 옆 금능해변은 맑은 날 얕은 물이 에메랄드빛으로 빛나고, 바다 건너 작은 섬 비양도가 함께 보여 제주에서 가장 사진 같은 풍경으로 꼽힙니다.

다만 협재·금능은 동부와는 섬 반대편이라 거리가 있습니다. 동부를 도는 일정에 무리해 끼워 넣기보다, 하루를 따로 두고 서부 권역을 묶어 보는 편이 낫습니다. 한림공원과 협재의 카페까지 더하면 서쪽 하루가 알차게 채워집니다.

협재 해변 — 맑은 날 얕은 바다가 에메랄드빛으로 빛난다
협재 해변 — 맑은 날 얕은 바다가 에메랄드빛으로 빛난다사진 Lcarrion88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제주 동부의 맛

제주에 왔다면 먹거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두툼하게 구운 흑돼지구이, 돼지고기 육수에 굵은 면을 말아 낸 고기국수가 제주를 대표하는 한 끼입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해녀가 갓 잡은 성게와 전복, 보말로 끓인 보말칼국수와 성게미역국이 별미로 꼽힙니다.

동부의 구좌 일대는 당근으로도 유명해, 제철이면 달큰한 당근주스를 맛볼 수 있습니다. 겨울이면 길가 곳곳에서 한라봉과 천혜향 같은 감귤을 파니, 제철 과일을 곁들이면 여행이 한층 달콤해집니다.

국물과 별미도 다양합니다. 은빛 갈치로 끓인 갈치조림과 구이, 모자반을 넣어 끓인 몸국, 메밀전에 무채를 말아 부친 빙떡은 제주 사람들의 일상 음식입니다. 관광지 식당만 들르기보다 동네 백반집을 한 번 찾아보면, 제주다운 밥상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습니다.

렌터카와 날씨 — 챙길 것

제주 동부를 제대로 돌려면 렌터카가 사실상 필요합니다. 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명소 사이 간격이 넓어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해안도로의 풍경을 즐기기에도 차가 편합니다. 운전이 부담스럽다면 일부 구간만 택시나 투어를 섞는 방법도 있습니다.

제주는 바람과 날씨 변화가 큰 섬입니다. 맑다가도 금세 흐려지고, 한라산 쪽과 해안의 날씨가 다를 때도 많습니다. 일정을 빡빡하게 짜기보다 날씨에 따라 순서를 바꿀 여유를 두는 편이 좋고, 바람을 막을 겉옷 한 벌은 계절과 상관없이 챙겨 두면 든든합니다.

며칠에 어떻게 — 동부 코스

1박 2일이라면 첫날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둘째 날 비자림·만장굴과 월정리 해변 정도로 묶으면 무리가 없습니다. 2박 3일이면 가운데 하루를 우도에 통째로 쓰거나, 셋째 날 서쪽 협재까지 더해 폭을 넓힐 수 있습니다.

숙소는 성산이나 구좌 일대에 잡으면 동부 명소 대부분이 가까워 이동이 줄어듭니다. 해돋이를 볼 생각이라면 성산 가까이에 묵는 것이 새벽 동선에 유리합니다.

제주 동부는 바다와 숲, 작은 섬과 동굴이 손닿는 거리에 모여 있어, 욕심을 줄이고 한 권역만 골라도 결코 심심하지 않습니다. 분화구에서 해를 맞고, 숲에서 바람을 식히고, 해변 카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 — 그 느긋한 하루가 제주를 가장 제주답게 즐기는 방법입니다.